동아시아 북위 1. 북위에서 수도 평성에서 뤄양(효문제)로 옮겼다는데 뤄양이 화북지방이라 한족처럼 할라고
동아시아 북위 1. 북위에서 수도 평성에서 뤄양(효문제)로 옮겼다는데 뤄양이 화북지방이라 한족처럼 할라고
1. 북위에서 수도 평성에서 뤄양(효문제)로 옮겼다는데 뤄양이 화북지방이라 한족처럼 할라고 수도를 옮긴거라고 이해해도 되나요? 그러면 북위를 선비족이 세웠다는데 한족이 중국민족느낌이면 선비족은 어떤나라랑 비슷하나요?

아래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100만 명의 강한 군사를 보유하여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공하였으며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와 제나라와 노나라를 휩쓸어 중국의 커다란 해로움이 되었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고려백제전성지시강병백만남침오월북요유연제노위중국거두)
고구려 장수왕이 붕어하자, 이를 들은 북위 효문제가 흰 색 위모관과 베로 심의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王薨 ... 號長壽王魏孝聞之制素委貌布深衣擧哀於東郊(왕훙...호장수왕위효문지제소위모포심의거애거동교)
(백제의) 무왕이 붕어하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使臣)을 보내 표를 받들어 상을 고하였는데,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
璋卒其子義慈遣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장졸기자의자견사봉표고애태종소복곡지)

대만에서 그린 고구려 영토지도
대만에서 그린 고구려 영토지도 자료의 근거 대만의 교과서 자료 평 대만의 역사교과서 역사부도에서 그려진 지도를 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황하이북으로 나왔네요. 대한민국은 반도사관, 황국사관, 일제사관을 따르는데,중국, 대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참 중국 황하이북지역은 모두가 고구려 땅이라고 표현했네요.외국에서 조차 이렇게 표현하는데,
"영락(광개토태왕) 8년, 황제가 염려하여 돌아온 후 산동성에서 변고(갑작스로운 전쟁, 침략)가 있었다.
이에 중산(전연; 도하; 모용선비의 수도)에 행대(行臺)를 설치하고
우군장군 윤국선이 기주에서 조세를 감독하고 있다가 황제가 장차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는 반란을 일으켜서 신도을 습격하고자 하였는데, 안남장군 장손숭을 보내 처리하게 하여 참하였다.
右軍將軍尹國先督租于冀州聞帝將還謀反欲襲信都安南將軍長孫嵩執送斬之
... 왕의 수레(거가)가 중산에서 출발하여 망도요산에 이르렀다. 산동 6주의 민관(백성과 관리) 와 도하(모용선비)를 옮겼다(피난 시켰다).
... 車駕發自中山至于望都堯山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고려(고구려)인 36만 명과 백공기공(百工伎巧; 기술자) 십만여 구로써 북위(北魏)의 수도(首都) 성락(盛樂)을 채웠다(고구려인 36만 명과 기술자 10만여 명이 북위의 수도 성락에 가득하였다.) ...
가을 7월에 평성(平城)으로 수도(首都)를 옮겼다."
<위서(魏書) 권2(券二) 태조기(太祖紀) 제2(第二) 천흥(天興) 원년(元年) 춘정월(春正月), 작자(作者): 위수(魏收) 북제(北齊>
※ 위서(魏書)는 북제(北齊, 550년~577년) 때 위수(魏收)가 지은 역사서로서,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년 ~ 491년)때부터 국호(國號)를 고려로 개칭(改稱)하였으므로 위서(魏書)에 고려(高麗)라고 써 있는 것입니다.
"영락(광개토태왕) 8년 무술년, 한 무리의 군대를 보내어 ... 토욕(티벳)을 순찰하도록 명령하였다."
<"고구려가 북위에 책봉 준 자료 있다" - 오마이뉴스>
"북위(北魏:386~534) ...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 문소황태후 ... 선무제 ... 를 낳았다.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와 북위 조정을 장악"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 중앙선데이 참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토욕(티벳)을 정복했다... 북위의 수도였던 업에 398년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했다... (북위의 수도였던 업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한 군사 100만 명을 보유하여서 북으로는 유주·연나라·제나라·노나라를 침공하고 남으로는 오나라·월나라를 휩쓸어서 중국에 커다란 해로움이 되었다... 고구려의 영토는 몽골에서부터 티벳, 블라디보스톡 등까지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속국 <북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참조>
<중국 북제는 고구려 속국이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월주(양자강 하류)에 이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왜(倭)에 이르른다. 백제의 서쪽 영토(西界)는 월주(양자강 하류)이며, 남쪽은 왜(倭)인데 모두 바다를 넘는다.
百濟扶夫(餘)之別種... 西渡海越州南渡海至倭... 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백제 부여지별종... 서도해월주남도해지왜... 백제서계월주남왜개유해)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북제의 후주가 또다시 백제의 위덕왕 여창을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동청주는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백제의 동성왕 10년에 북위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백제 22담로를 설치하다 담로(擔魯)는 백제가 중국과 일본에 설치한 지방행정 조직이다. 중앙집권화...
"모대(백제의 동성왕)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 '신이 파견한 바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 長史 臣) 고달(高達)과 행건위장군조선태수 겸 사마 신(行建威將軍朝鮮太守 兼 司馬 臣) 양무(楊茂)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行宣威將軍 兼 參軍 臣) 회매(會邁) 등 3인은 ... 각자 가행직(假行職)을 내렸습니다 ...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자께서 살피시어 일일이 하나 하나 노력하여 정식으로 벼슬을 주시길 바랍니다 ... 달(達)은 ... 지금 임시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로 (임명)하였고 무(茂)는 ...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로 (임명)하였고 매(邁)는 ...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로 (임명)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천자는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 장군 호칭을 허락하고 태수 벼슬을 주었다."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 伏願天監特愍除正 ... 達 ...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茂 ... 假建威將軍廣陵太守邁 ... 假行廣武將軍靑河太守詔可竝賜軍號除太守
<남제서(南濟書)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백제(百濟)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이 해에 북위 오랑캐가 또 다시 일어나 기병 수십만 명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니 모대(백제의 동성왕)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서 군대를 통솔하여서 북위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 모대(백제의 동성왕)가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표를 올려 '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假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假行安國將軍) 벽중왕(?中王)으로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假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로 삼고 목간나는 ...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天恩)을 베푸시어 일일이 하나하나 노력(努力)하여 순종하여 벼슬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 牟大遣使上表曰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爲行安國將軍?中王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木干那 ... 爲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聽除
ㅡ 『남제서(南齊書)』 권 58(卷 五十八), 「열전(列傳)」 39(三十九), 백제전(百濟傳)
<백제의 요서진출 - 교양우리역사,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隋書)의 <백제전>(百濟傳)... 백제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3개월을 가면 담모라국에 닿은데 남북으로 천여리... 동서로 수백리가 되며 사슴이 많이 난다... 백제에 부용(附庸)하고 있다"... 부용은 속국(屬國)이라는 뜻... 담모라는 제주도가 아니라 대만임이 확실... 백제에서 배를 타고 3개월... 남북 1천리, 동서 수백리라는 담모라국은 대만일 수 밖에 없다... 대만의 남북 직선거리가 965리(386km)... 동서 폭은 360리(144km)... 사슴이 많이 났다... 흑치상지... 흑치(黑齒) 땅을 통치... 흑치가 바로... 필리핀
廣西(광서, 광시)에 백제(百濟)가 살아 있다... 壯族(장족)은 중국역사상의 越族(월족), 즉 베트남 종족이다. 광서壯族(장족)자치구... 百濟(백제) 사람들이 무슨 까닭으로... 중국 남쪽 끝까지 가서 살았다고 합디까... 소진철 교수... 白濟鄕(백제향)과 百濟墟(백제허)... 百濟(백제)가 해외에 개척한 擔魯(담로) 중 하나라고 합디다... 그곳이 百濟(백제)부흥전쟁시기의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의 출신지... 鄭福田(정복전) 主編(주편)의 『中國將帥全集(중국장수전집)」... 「黑齒常之(흑치상지, ?~689년), 唐(당) 高宗(고종) 李治(이치), 武則天(무측천=측천무후)時 名將(명장), 百濟(백제, 今(금) 광동(廣東) 欽縣(흠현) 西北(서북) 西部人(서부인」』... 日本(일본)에서 귀국한 의자왕의 장남 夫餘豊(부여풍)을 왕으로 받들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663년 8월 白村江(백촌강)전투에서 백제-왜국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대패... 백제 王(왕)은 흑치상지의 증조부 文大(문대)를... 흑치국의 侯王(후왕) 또는 총독... 에 봉한 것 같은데... 흑치국도 백제의 담로국 중 하나... (南朝(남조)의 梁(양) 元帝(원제)... 「梁職貢圖(양직공도)」... 武寧王(무녕왕)은... 22개 담로국과 9개 旁小國(방소국)을 두고 다스리고 있었다)... 흑치국을 필리핀... 중국 양자강 이남... 越族(월족)... 일본 天皇(천황) 즉위 때... 이에 검은 물을 들인다... 중국 동남부... 서남부... 동남아시아... 에 흑치국이 존재... 현 廣西壯族(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을 흑치국의 治所(치소: 통치기구의 소재지)... 우리 선조는 山東省(산동성) 白馬江(백마강) 유역에 살았는데... 이곳으로 집단이주했다... 壯族(장족)들은 百濟墟(백제허)를 「DaeBakcae(대백제)」라고 읽습니다... 일본인들이 百濟(백제)를 「쿠다라」라고 부르는 현상과 같은 것... 「쿠다라」는 「큰나라」의 우리 古代語(고대어)에서 유래된 것... 壯族(장족) 아이들에겐 몽골반점이 있다... 이곳 집집의 방앗간에는 외다리방아가 있고, 부엌엔 주둥이에 홈이 팬 맷돌이... 모두 옛날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양식... 오늘날 전라도나 일본의 오지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거... 부엌도... 우리처럼 坐式(좌식)입니다... 越(월)의 유민들은 해안을 따라 복건성·광동성·광서성... 으로 남하했다... 越族(월족)은 한국인처럼 궁둥이에 몽골반점이 있다. 이것은 越族(월족)이 북방 초원지대에서 중국 동해안을 따라 南下(남하)해 왔음을 의미... 그들은... 중국의 광동성·광서성과 북부 베트남 하노이(河內)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壯族(장족)... 은 배후에 성공한 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백제가 扶南國(지금의 캄보디아)과 교역한 사실이 日本書紀(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北인도 지역에서... 카펫을 수입해 왜국에 선물하기도 했다. 백제는 왜국과 直(직)교류를 시도하던 崑崙(곤륜: 지금의 미얀마로 비정됨)의 사신을 水葬(수장)시켰는데... 對倭(대왜) 교역의 독점을 시도한 것... 백제 聖王(성왕) 때의... 謙益(겸익)은 해상 실크로드를 이용해 中印度(중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도 했다... 南(남)중국해에 인접한 廣西(광서)에 百濟郡(백제국)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廣西(광서) 壯族(장족)자치구... 百濟墟(백제허)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향한 百濟(백제)의 무역거점 - 월간조선 참조>
"백제국이 진·송·제·양 4대 시기부터 양자강 좌안에 웅거하였으며, 북위 시기부터는 중원을 차지하였다." 自{전치사(개사)}晉宋齊梁據江左(自)後魏宅中原
진나라 때 구려(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침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더불어 함께 요동의 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의 수도는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宋書)>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밖에 있었다. 진나라(A.D.265~316) 때에 고구려가 이미 침략하여 요동을 점유하였다. 백제도 또한 웅거하여 요서 진평 2군을 점유하였도다. 백제는 스스로 요서 진평 2군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晉世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軍 <남사(南史)>
부여는 녹산에 있었다. 백제의 침공을 받고 부락이 쇠산해져서 전연(前燕. A.D.337~370)과 가까운 서쪽으로 옮겨갔다. 모용황이 부여를 습격하였다. 永和二年(A.D.346)初夫餘居于鹿山爲百濟所侵部落衰散西徒近燕... 燕王皝... 襲夫餘 <자치통감(資治通鑬)>
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구려(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웅거하여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였도다. 백제는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양서(梁書)>
502년 백제 무녕왕 2년(A.D. 502; 百濟 武寧王 2)에... 얼마 후 백제가 고구려에게 격파된 바 날로 쇠약한 나라가 되더니 남한 땅으로 옮겨갔다.
天監元年... 尋爲高句麗所破衰弱者累年遷居南韓地
백제의 국경선은 서북쪽으로 지금의 광녕·금·의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넘어서 멀리에 까지 이르고 동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 등에 이른다...
百濟之境西北自今廣寧錦義南踰海蓋東極朝鮮之黃海忠淸全羅等...
송서는 백제의 수도가 이 진평군 진평현이라 일컬었다.
통고에 이르기를 당나라의 유성과 북평의 사이인데, 곧 백제의 수도는 요서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전주 경내에도 또한 제2의 수도가 있었는데, 요서의 수도가 위태롭자 양나라 천감 때에 남한의 성으로 수도를 옮겨서 편안하게 하였다.
而朝鮮全州境內又有俱拔故城殆梁天監時遷居南韓之城歟
백제는 당나라의 현경 중에 5도독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5도독부는 덕안 ... 웅진 ... 동명이다. 동명은 백제의 시조인데, 고리에서 강을 건넜으므로 동명도독부는 마땅히 고리국과 더불어 서로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曰德安 ... 熊津 ... 曰東明者東明爲百濟之祖自槀離渡河以之名地當與槀離國相近考
요사에서 고리는 봉주와 한주를 뜻하는데, 모두 지금의 개원 지역에 있으니 곧 동명도독부도 또한 응당 개원과 서로 가까워야 하리라.
遼志槀離爲鳳州韓州皆在今開原境則東明都督府之設亦應與開原邇矣
듣건데, 당서는 또한 후에 신라와 발해말갈이 백제를 나누어 가져서 백제는 마침내 멸망하였다언급했다하는데, 그러나 오대에서 원나라까지 오히려 백제가 조공하였다는 문서가 있다.
耳唐書又言後爲新羅渤海靺鞨所分百濟遂絶而自五代迄元尙有百濟貢之文
고찰해보건데, 백제가 옛적 5방을 설치하였다. 방은 10군, 곧 여러 고을 10개를 다스렸으므로 5방은 50군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한 신라의 67성을 취하여 그 넓이와 수가 더욱 광대하여졌는데, 소정방이 얻은 백제 영토는 37군에 불과했다.
考百濟舊設五方方管十郡則列郡十唐初又攻取新羅六十七城其幅員益廣蘇定方所得止三十七郡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대청제국 건륭제>
《월(越)의 광동어 발음이 왜(yueh:yue)이다. 월(越)나라(베트남) 사람들이 왜(倭)이다.》

네이버 파파고
월나라(베트남) 세력들도 BC 306년 초나라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멸망
<... 오월 전쟁과 오나라의 멸망 그리고... 왜의 확산 - 미디어시시비비 참조>

[朴東-11] 오·월 전쟁과 오나라의 멸망 그리고 초기 동이 왜의 확산
[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왜(倭)는... 필리핀, 대만과 해남도(하이난 섬), 그리고 그 섬들과 마주보는 해안... 에 존재
<왕인의 시대에는 대륙의 왜만 있었을 뿐, 일본은 없었다. - 영양신문 참조>
백제는 한반도 내 존재했던 왜(倭)와 연합국가적 성격... 왜(倭)의 기원 신화에 등장하는 건국의 신의 명칭 구조가 가야의 두 건국자의 명칭 구조와 흡사... 가야(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여러 왕국을 세웠다가 근대에 들어서 버마·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을 건국했다.
<왜인은 중원에서 흘러온 유민이다 - 미래한국 참조>
일본 역사의 시조인 '응신'이 가야인... 응신이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가 함락됐을 때...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다... 응신은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가야인들이 일본에 소와 말을 데리고 일본 후쿠오카에 상륙... 오사카에 도달... 가와치 왕조를 세우고 150년 동안 지속하다가... 주도권을 백제계인 아스카로 넘겨주게 된다.
<일본 속 가야문화 (3) 가야, 일본으로 건너가다 - 경남신문 참조>
<일본을 정복한 한국인 이야기, 호소노 프랭크 作(작), 신동락 譯(역)>
<日本(일본)을 創建(창건)한 伽倻人(가야인): 天皇家(천황가)의 祖上(조상)들 / 프랭크호소노 著(저); 任星熙(임성희), 李達淳(이달순) 共譯(공역)>
임나를 가야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임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참조>
임나란 가야...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가야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고, 금관가야... 대가야를 특정하기도
<임나(任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일본서기는 가야를 임나로 불렀다... 적지 않은 가야사 전공자들이 가야를 임나라고 한다.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가 맞는가 - 경남매일 참조>
왜(倭)가 가야의 별칭이다... 백제 사람들이 가야 사람들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르면서
<위왜설(僞倭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가야를 광개토호태왕비에서는 왜(倭)라고 표현 ㅡ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동북(東北)대 명예교수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2부 - 왜(倭), 바다를 건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1부 - 왜(倭)는 한반도에 있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2부 - 왜(倭), 바다를 건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3부 - 왜(倭), 신대륙을 개척하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거란은 선비족의 하나이다. <... 거란의 흥기와 전연의 맹 - 우리역사넷 참조>
거란은 퉁구스와 몽골의 혼혈족으로서 동호(東胡)계의 한 종족 <거란(契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한민족(韓民族)은 퉁구스-몽골계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의 뿌리"를 말하는 의사들: 의학 유전학과 한국인 기원론, 1975-1987 현재환(독일 막스플랑크과학사연구소 박사후연구원, 과학사 전공) Doctors Discussing "the Root of Koreans": Medical Genetics and the Korean Origin, 1975-1987 Jaehwan HYUN(Max-Planck Institute for History of Science, Germany - 대한의사학회 참조>
실위(몽골)는 거란(한민족. 韓民族)의 무리이다. 남쪽에 있으면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으면 실위(몽골)라고 부른다.
실위(몽골)인은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 있던 탁발선비의 잔여세력으로 탁발선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 저자: 장지우허, 번역: 북방사연구팀(2009), 소나무, 60~73쪽 참조>
달단은 곧 몽골이므로 원나라의 후예이다. 韃靼卽蒙古故元後也 <명사(明史)>
달단(몽골)은 말갈(여진)의 남겨진 후손 종족이다. 韃靼靺鞨之遺種 <신오대사(新五代史), 동북아역사넷 참조>
달단(몽골)은 이전에는 여진과 더불어 같은 종족이었다. 모두 다 말갈의 후예이다.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 달단(韃靼) 관새(款塞) 몽국(蒙國) 본말(本末)>
마간(마한), 말갈, 발해는 같은 소리다. 서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전통은 자명한 것이도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 별종(종족)이다. 渤海靺鞨大祚營者本高麗別種也 <구당서(舊唐書)>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불렀는데 고려(고구려)의 별종(종족)이다.
정안국(발해의 후예)은 본래 마한(고구려)의 종족이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좌우궁인을 인솔하여 바다를 넘어서 남쪽 한지에 이르러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다... 최치원이 이르기를, '마한(한, 기자조선)이 고구려이다.' 라고 하였다.
魏滿擊朝鮮朝鮮王準率宮人左右越海而南至韓也開國號馬韓...崔致遠云馬韓麗也
고구려 ... 는 ... 태양, 기자,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태인은 숙신 역시 은나라의 속국이며, 숙신을 동쪽 숙신이라 칭하였는데, 숙신은 은나라 동쪽 땅에 있었다라고 생각하였다. 동작빈씨는 숙신은 숙신씨인데, 은나라 때 은나라 동방의 속국이 되었으며, 그 땅은 마당히 지금은 양양의 동쪽, 산동의 동부, 대략 지금의 산동 제남 일대이다... 후한서에 근거하여 서술하였는데, 숙신부락은 당시 황하 하류 태산 부근 중국의 평원 지구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거기에서 온 것같다. 주나라 조정에 의해서 각 부락이 배제되어 산동반도에 이르렀다가 이후에 또한 배제되어 요동반도와 조선반도에 도달했다.
吴泽认(오택인)为(위; 생각하다): "肃亦殷屬国, 肃称(칭) 东(동)肃, 在殷东(동)土也. 董(동)作宾(빈)氏说(설): 肃, 疑即肃慎氏为殷时(시)东(동)方的屬国, 其地当今安阳(양)之东(동), 山东的东部, 约(약)当(당)今山东济南一带. ?联(련)人沙弗库(고)诺(낙)夫亦说: 据(거) 后汉书(후한서) 所述(술), 肃慎部落当时居住黃河下游(유. 下流)以南(이남)泰山(태산)附近(부근)的中国平原地区(구); 看(간)来(래)他们(문. 무리)从(종. 쫓을)那(나. 어찌)里(종날리. 거기에서)被周朝各部排(배. 물리칠)㨈(제. 밀칠)到山东半岛, 而后又被排㨈(피배제)到辽(료. 멀)东半岛和(와. 접속사)朝鲜半岛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과 여진족은 동일하다.
<왕건군(王健群) 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
숙신(肅愼)이 바로 조선(朝鮮)이다. 숙신(肅愼)은 ... 조선의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정인보의 오천 년간 조선의 얼-조선사연구 제7강>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사료상으로 東夷(동이)에 속하고 있다.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형성 과정이 유사하고 새(bird)라는 공동의 토템을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발상지로 보고 있다.
<L. R 꼰제비찌 『한국의 역사적 명칭』, 모스크바 : 1970, 63~67쪽 참조>
조선이란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 오늘날 퉁구스어에서 Sokze(n), Sokcen이나 몽고어에서 Juksen은 '예(禮)'를 가리키는 말이다. 言語學的(언어학적)으로는... 肅愼(숙신)의 對應語(대응어)로 들수 있으나... 滿洲(만주) 지역에는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民族(민족)이 들어와 살다가 移動(이동)하였기 때문에 古代(고대)의 肅愼(숙신) 이래 女眞族(여진족)이 출현하기까지 적어도 몇 차례의 民族移動(민족이동)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古肅愼氏(고숙신씨)와 淸王朝(청왕조)를 세운 女眞族(여진족)을 同一(동일)한 種族(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S. M. 시로코고로프, 북방 퉁구스족의 사회적 체계) 147 ~ 169 페이지 - 參考文獻(참고문헌),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숙신은 서주(西周) 때 북방 제후국 이름인데 ... 북이(北夷)다.
상서대전에서 이르기를, '동이[東夷. 해동의 모든 이]는 구려(고구려)·부여·간(마한, 한, 기자조선)·맥(구려)의 족속이다.'라고 하였다...
한후(韓侯)가 곧 기씨이다. 그런즉 한(韓)의 명칭이 기씨에서 유래된 듯하고 기씨의 명칭이 한(韓)이다.
주나라 성왕이 이미 동이(東夷)를 정벌하였다라는 서경의 구절에서 동이(東夷)를 공안국은 '구려(고구려), 부여, 간(마한, 한, 기자조선), 맥(구려)의 족속이다.'라고 했다. 한서(漢書)에서 '간은 한(韓)이다.'라 하였다.
《書·序》『成王旣伐東夷』傳:『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正義》、《漢書》有高句麗扶餘韓無此馯馯卽韓也音同而字異耳
려(麗)는 리(离)로 발음하고 고려(高麗)는 고리(高离)로 발음한다. 麗音离高麗也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려를 나라 이름으로 읽을 때에는 리로 발음한다. <강희자전>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에서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 고리왕(고려왕)의 아들이다.
백제의 선조는 고려(고리)에서 나왔다. 고려국왕(고리국왕)에게 한 시비가 있었는데 갑자기 임신을 ... 동명
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國王有一侍婢忽懷孕 ... 東明
맥(貊)은 우두머리가 되거나 밝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산해경 백민국조>
맥족(貊族)의 맥(貊)자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유어인 백, 호, 박과 같다. 맥(貊)의 별칭인 박고란 밝고, 밝다의 의미로 풀이한다. <맹자 고자편>
맥(貊)은 종족명(種族名)이고 예(濊)는 지명(地名), 수명(水名)으로 보아 예맥(濊貊)은 구맥(九貊) 중의 일종(一種)을 지칭한 것이다. <정약용의 예맥고(濊貊考)>
예(濊)는 예수(濊水)에 거주하던 맥족(貊族)이다. <능순성의 송화강하적혁철족>
소에 이르기를 "한서에 구려, 부여, 간이 있는데, 이것은 간이 아니다. 간은 곧 저 한이다. 음은 같으나 글자가 다르다."라고 하였다.
䟽云漢書有駒麗扶餘馯無此馯 馯卽彼韓也 音同而字異
함께 추대하여 그 추대된 호걸을 일컬어서 그 한이라고 하였다.
정치권력은 백성들의 합의와 추대에서 비롯된다... 제후와 천자 또한 그 같은 과정에서 선출된 장이다... 권력의 기원이 아래로부터의 합의에 있기 때문에... 천자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합의와 전체의사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면서... 그 전통이 무너졌다... 통치자는... 일의 능률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다. 적임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뽑아 맡겨야 하고, 이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다.
<탕론(湯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한국의 염색체 분석에 의하면... 70~80%는 북방계이고 20~ 30%는 남방계이며 나머지는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
일본 오오사카(大阪) 의과대학의 마쓰모도...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한민족은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분류학적 거리에 있다...
특히 한국인과 전 세계 86개 타민족 DNA를 비교한 결과 한국인과 몽골인 간 유전적 유사성...
한국인은... 만주족 그리고 일본인 순으로 가까웠다.
<한국인과 중국인 "DNA가 다르다" 이종호 한국고학저술인협회 회장 - 인사이트코리아 참조>
한국인은... 중국 동북부 만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했고...
이는... 북방계와 남방계 혼합 민족이라는 사실...
일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이주했음을 나타내는 유전학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던 여진족과 만주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새로 편입시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인은... 남방과 북방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다양성을 지닌
<미래&과학... 한국인의 핏줄, 누구와 더 가깝나? 과학향기 - 한겨레 참조>
한국인과 만주족은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하다고 알려져 있다...
1000년 이상 부여, 고구려와 발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이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2000년대 초까지 만주인이 민족 분파 중 하나로 존재했다... 한국 성씨를 부여하면서... 완전히 한국인과 동화...
북한에는... 만주족이 명절 때 만두를 먹는 풍습이 남아 명절 때... 만둣국을 먹는다.
<1000년 이상 같은 나라였다... '만주족' 재조명 - 중앙일보 참조>
일본의 인류학자 시노다 켄이치는 중국의 동북부 집단과 한반도, 그리고 본토 일본인은 거의 비슷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하플로 그룹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욱 단국대 교수는... 한국인 집단이... 북방 계통의 유전자풀과 남방 계통의 유전자풀이 복합...
한국인 집단은... 만주족 그리고 일본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분석된다.
<한민족 DNA를 찾아서(17회) 한민족의 기원과 추정 이동 경로 - 한국NGO신문 참조>
한국인집단은... 중국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였으며...
묘족...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본인 집단은... 한국인 및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였는데...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학적 증거가 된다...
한국인집단은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집단은... 다기원적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유전자 분석으로 본 한민족]중국 북부의 농경문화 민족이 주류 형성, 저자: 김욱, 출판호수 2003년 10월호 참조>
일본... 본토 거주자는 한국인의 유전자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일본 종합연구대학원 연구팀... 사이토 나루야(齊藤成也) 교수
<"일본 본토인 유전자 한국인과 거의 비슷" - 한국일보 참조>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높은 연관성을 지녔다...
서울대 의학연구원 유전자이식연구소(소장 서정선 교수)와 과기부 동북아민족기능성 게놈연구사업단 주최로 열린 '동북아 민족 기능성 유전체 연구사업 성과 발표 및 동북아 민족 유전체 연구 심포지움'에서 한림의대 김종일 교수는 이같이 밝혔다.
<'한국인, 몽골인과 유전적으로 가깝다' - 데일리메디 참조>
우리와 뿌리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던 민족 바로 몽골인입니다... 유전자분석 결과 이런 추정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닮은 꼴 - KBS 뉴스 참조>
한국인과 몽골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두 그룹이 유전적으로 높은 연관성을 가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유전자이식연구소(소장 서정선, 서울의대 생화학교실 교수)와 과기부 동북아 민족기능성 게놈 연구사업단... '동북아 민족 유전체 연구 심포지엄'
<한국·몽골인 유전 연관성 높다/만성질환 유전자 발굴 전기 마련 - 메디컬옵저버 참조>
전세계 86개의 타민족 DNA를 비교한 결과, 한국인과 몽골인 두 그룹의 유전적 연관성이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김종일 한림의대 교수가 밝혔다...
서정선 서울대 유전자이식연구소장은 "이 사업이... 난치병의 질환유전자를 발굴하는... 목표달성외에도 한국인의 기원과 같은 인류학적,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고구려연구회 등 사학계와 공동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전했다.
<한국인-몽골인 소수민족 유전적 연관성 높다 - 의학신문 참조>

후조
後趙 319년 ~ 350년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갈족 (羯族) 흉노의 분파로써 눈이 깊고 코가 크며 눈 색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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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의 후조(後趙) 건국
Gil-sun Jung 받는 사람 한뿌리사랑 세계모임어제 오전 5: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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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흉노①…유연, 한족 탈 쓰고 중원 차지하다 - 아틀라스뉴스
남흉노의 마지막 선우 호주천선우(呼廚泉單于)는 어부라선우(於扶羅單于)의 동생이었다. 어부라에게는 유표(劉豹)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부라선우는 가문의 선대에 한(漢)나라 공주가 시집왔기 때문에 한나라 황...
갈족(羯族)은... 흉노... 에게 정복되어 흉노족의 노예가 되어서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까지 강제이주... 동아시아의 영웅 염민은 갈족(羯族)에게 가축과 성노예로 잡혀 있던 수십 만의 소녀들을 구출했다.
<한족에 의해 멸망된 갈족>

한족에 의해 멸망된 갈족
백인종이었던 갈족(羯族)은 여자를 잡아서 노예로 삼았다가 이동시에는 식량으로 사용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보였다... 한족은 후조(後趙)를 세웠던 갈족(羯族)을... 몰살시키고 그 시대를 기억조차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 "삼국지 인문학" 특강 - 유선편 - 톱뉴스 참조>
갈족(羯族)은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일대에 거주하던... 소그드인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 신동아 참조>
소그드인은... 스키타이족으로도 불리는 이란계 민족 <소그드인, 스키타이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년 7월... KBS역사스페셜... 에서 스키타이... 신라인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이 밝혀졌다.
<김일제는 신라인이었을까 - 한겨레:온 참조>

<고인골 유전자 분석표 - KBS 역사스페셜 참조>
파슈툰족은... 이란계 민족... 탈레반... 스키타이족... 파슈툰족에게서 출토된... 금관... 경주에까지 이어졌다.
<... 아프가니스탄 금관이 경주 금관... - 탄소중립net-zero투데이 참조>

스탄 스탄 스탄 아프가니스탄 금관이 경주 금관과 관계 있다고? - 탄소중립투데이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산하의 많은 나라, 민족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다. ‘스탄’ 은 페르시아 어로 ‘누구의 땅 혹은 나라’를 의미한다. 키르기스스탄은 40여 부족인 키르키스 민족의 나...
<탈레반이 추종하는 건 부족 관습..."여성탄압 계속될 것" ... - 한국일보>

탈레반이 추종하는 건 부족 관습..."여성탄압 계속될 것" [Deep & wide] | 한국일보
돌이켜보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모태였다. '소련판 베트남전쟁'으로 한방 먹이려던 미국은 대소련 항전 전사를
신라의 금관과 아프간 금관은... 친척... 흉노에게 쫓겨 나라를 세운 대월지국... 아프간... 신라 <... 탈레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신라 - 극제신문 참조>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0> 탈레반도 못 훔친 아프가니스탄 금관, 그리고 신라
아프가니스탄은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이며 불교가 아시아로 전해지는 중간루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전세계 많은 학자들은 동서교차로인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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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뿌리, 아프가니스탄 황금문화
<앵커 멘트> 우리 고대 문화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신라 금관, 수세기 전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중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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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금관의 ‘원조’ 아프간 금관 한국에 왔다
문화재 동네에서 국내 전시를 열망해온 신라 금관의 ‘원조’가 마침내 이 땅을 찾아왔다. 5~6세기 신라 금관의 선조로 꼽히는 고대 아프가니스탄 유목민의 금관이 세계를 돌고 돌아 한국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4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공개된 이 금관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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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라 금관, 아프간에서 왔다고?
4~6세기 신라 금관의 뿌리가 아프가니스탄이라면? 믿기지 않지만,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그 가능성을 높게 본다. 현지 시바르간의 북방유목민 고분 틸라테페에서 출토된 기원전후 시기의 금관이 역시 북방문화계통인 신라금관과 수목, 새 장식 등에서 비슷하면서도 시기는 훨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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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 빼닮은 '아프간 금관' 한국 왔다
신라 금관 빼닮은 아프간 금관 한국 왔다 오늘부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 탈레반 피해 숨긴 아프간 유물들, 佛기메박물관 등 세계 돌며 전시 틸리야 테페 금관과 신라 금관 나뭇가지·새·영락 장식 등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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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프간 금관? 신라금관과 똑 닮았네
얇은 금테두리에 달린 영락(瓔珞·구슬 장식물)하며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까지….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금관과 닮은꼴이다. 물론 세부 형태나 제작 기…
www.donga.com 신라왕관 양식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래됐다? - 현대불교
화려한 문양과 세련된 세공기법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로 꼽히는 신라 금관의 기원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지역인 대월지(大月氏)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웨이정(韋正)ㆍ팡샤오톈(方笑天) 베이징대학 ...
신라 유물의 일정한 특징은 소그드족 유물과 비슷한 점입니다. 소그드족은... 중앙아시가 타지키스탄 부근을 중심으로 살던 이란계 민족
<신라 황금 유물이 일본에 온 까닭은? - 오마이뉴스 참조>

신라 황금 유물이 일본에 온 까닭은?
국립 경주 박물관 등 한국 유명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라 황금 유물을 비롯한 국보급 문화재 100여 점이 이 '유라시아의 바람 신라에'라는 제목으로 시가켄에 있는 미호 뮤지엄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습니다. 미호 뮤지엄은 중국계 프랑스 건축가 I.M. 페이가 도화 원기를 모티브로 건물을 설계하여 지었습니다. 건물 ...
거사는 옥(玉)을 뜻하는 카시(kash), 쿠시(kush)의 한자음 가차... 월지연맹체를 구성하던 하위집단 카시(kash) 부족...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한족(漢族) 사람들은 거사(車師)... 라고 기록... 갈족(羯族)은 본래 흉노족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 민족의 하나... 갈족(羯族)의 갈(羯)은 거세한 양을 뜻하지만 이 종족의 원음이 카시(kash)... 민족은 소무구성이라 기록된 소그디아나(파미르와 텐산 이서의 중앙아시아) 출신들인 소그드인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저자) 연호탁 참조>
(박혁거세) 居西干(거사간)은 흉노-알타이계 부족장
<騎馬흉노국가 新羅 연구... - 월간조선 참조>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무리가 많았는데, 마한(고구려) 동부에 많이 머물렀으며 진한에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하니 마한(고구려)이 이를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盛故馬韓忌之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혁거세(赫居世) 거사간(居西干)>
신라인은 그 선조가 본래 진한 종족이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진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도망온 자들인데 마한(고구려)이 그 동쪽 영토를 분할하여 거주하게 하였으며 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 그 언어와 사물을 일컫는 것이 중국인과 비슷하다... 마한(고구려)와 같지 않다... 이는 그 자들이 흘러들어온 자들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항상 마한(고구려)의 통제를 받았다...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
新羅者其先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以中國人... 不與馬韓同... 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初附庸于百濟
고구려와 백제가 夫餘系(부여계)... 부여계는 인종적으로 퉁구스계... 신라는 흉노계...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출자)가 다르다... 居西干(가사간)은 흉노-알타이계 부족장... 위만조선의 지배층과 낙랑군의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이 흉노 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위만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위만조선이 망하거나(기원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증 정치변동기에... 이동하여 경주지역에 정착하였다... 위만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주민)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진나라)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진수)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 한무제가 기원전 2세기에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위만조선을 친 것이다... 漢武帝(한부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漢族(한족)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
<騎馬(기마)흉노국가 新羅(신라) 연구 - 월간조선 참조>
수와 당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국을 호국(胡國)이라했다.
<유목민족 가리키는 '호'의 변천 - 한겨레 참조>, <시대·시기별로 '호'의 정체 달라 - 한겨레 참조>
월지의 후손일 가능성이 아주 큰 소그드인을 왜 중국인들은 胡(호)라고 불렀을까... 월지가 흉노에 쫓겨 소그디아나 지역으로 서천하기 전... 거사... 는 왕가의 명칭... 車師... 를 차사... 가 아닌... 거사... 로 읽는 연유가 그와 관련... 흉노에 몰린 월지의 한 갈래... 끝이 뾰족한 펠트 모자는... 스키타이의 뾰족 모자... 玉(옥)... 을 뜻하는... 쿠시... 카시... 의 음차어... 車師(거사)... 胡(호)는 처음에는 특히 흉노를 지칭... 나중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서역의 이민족 마저 胡(호)
<... 말(言)... 고민에 사막의 뜨거운 밤은 새벽까지... - 교수신문 참조>
胡(호)가 범어로 술리[Suli. 蘇哩(소리)]다.
소리[蘇哩. Suli(술리)]가 수그딕(Su...ik)의 한자음 음사어로 소그드를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튀르크 민족사는 흉노에서 출발한다... 흉노 제국의 지배 계층은 튀르크계임이 분명하다... 훈족을 흉노족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突厥(돌궐)... 은 튀르크의 중국어 음역으로... 돌궐을 위구르가 이어받고, 그의 일파인 오우즈족이 서진해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이루었다...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정착국가를 건설... 백인종 전사가 튀르크족의 원류... 즉 튀르크족의 특질을 흰색 피부, 짙은 눈동자... 를 가진 백인종, 그 중에서도 4대 백인종 그룹의 유로피드 투라니드(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으로 보고 있다... 언어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카스피해 북서 초원 지대가 튀르크족의 본거지... 러시아 남부의 스키타이와 뚜렷이 구분되는 체질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 점
<터키사 100 "가장 쉽게 읽는 터키사", (공)저: 이희수 참조>
알타이... 백인... 알타이 산맥이... 황인종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준다... 스키타이... 페르시아 출신 월지족... 중요한 점은 백인이라는 거다... 몽골초원 흉노무덤 출토 직물 속에 등장하는 백인. 몽골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알타이 지역 고대무덤뿐 아니라... 몽골초원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백인... 몽골 초원에 황인종이 산 역사는... 짧다... 1천년도 채 되지 않는다. 12세기 징기스칸의 몽골족이 진입하기 전 8세기-11세기 몽골초원의 주역... 위그르족은 백인이다... 6세기-7세기 몽골초원의 주역은 돌궐족, 오늘날 터키인, 백인인 투르크다... 훈(흉노)... 백인용모를 유물에 남겨 놓는다. 고인돌의 전파 경로에 있던 알타이 지역과 몽골 초원 거주자 대부분 백인이었다.
<고인돌에서 나오는 백인 추정 유골... - 단비뉴스 참조>
흉노의 모돈(묵특선우)이 새로이 북이(기자조선)를 정복하였다. 匈奴冒頓新服北夷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묵특 ...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 ...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 ...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2) - 대한민국 정책포럼 참조>
위만조선의 주류도 흉노족 <한반도의 철기문화 몽고의 오르도스계 영향 - 중앙일보 참조>
(흉노의)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좌우궁인을 인솔하고 바다를 넘어서 남쪽 한지에 이르러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마한이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이르기를 '마한이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魏滿擊朝鮮朝鮮王準率宮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崔致遠云馬韓麗也
동쪽으로 위만조선을 쳐서 현토·낙랑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東伐朝鮮起玄?樂浪以斷匈奴之左臂 <한서(漢書)>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무리가 많았는데, 마한(고구려) 동부에 많이 머물렀으며 진한에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하니 마한(고구려)이 이를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盛故馬韓忌之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혁거세(赫居世) 거사간(居西干)>
신라인은 그 선조가 본래 진한 종족이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진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도망온 자들인데 마한(고구려)이 그 동쪽 영토를 분할하여 거주하게 하였으며 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 그 언어와 사물을 일컫는 것이 중국인과 비슷하다... 마한(고구려)와 같지 않다... 이는 그 자들이 흘러들어온 자들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항상 마한(고구려)의 통제를 받았다...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
新羅者其先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以中國人... 不與馬韓同... 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初附庸于百濟
"조심하여 꼼꼼하게 따져 검토해 보면,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되어 있었다(신라는 초기에 백제의 속국이었다). "謹案新羅始附庸於百濟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대청제국 건륭제>
"신라는 애초에 백제에 부용(속국, 식민지)되어있었다."新羅 ... 初附庸於百濟 <북사 당·이연수 열전 사이(北史 唐·李延壽 列傳 四夷)>
신라가 가야 백제 고구려 일부를 차례로 병합해... 중국 한자어가 대량 유입. 이때 우리말은 엄청난 시련. 다행히 30여 년 만에 나당 국경을 가로막는 발해가 생기고 고구려와 가까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고구려 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부여족과 가까운 몽골족의 원나라가 차례로 일어나면서 고구려 백제어와 같은 계통의 북방어가 적잖이 들어와 우리말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통일신라 때 한자어 대량 유입 - 한겨레 참조>
광개토대왕이 보병과 기병 ...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신라의 수도에 이르니, 왜군(가야 군대)이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왜군(가야 군대)을 추격하여 금관가야(왜)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신라 매금 내물왕이 직접 고구려에 와서 광개토대왕께 조공하였다." ㅡ 광개토대왕비문
<고구려는 왜 가야를 정벌했나 - 매일경제 참조>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4)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 경향신문 참조>
백제는 옛날의 래이(來夷)이며 마한(고구려)의 족속이다. 진(晉)나라 때에 구려(고구려)가 요동·낙랑을 차지하여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현을 차지하였다... 백제 주변에 작은 나라들이 있어서... 사라(신라) 등이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麗畧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旁小國有... 斯羅... 等附之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사(百濟國使)>
섭라(신라)가 백제에 병합되었다. 涉羅爲百濟所竝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문자왕(504년 04월)>, <"섭라는 제주도가 아니라 신라로 봐야 한다" - 미디어제주>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에 있다. 신라 땅은 동으로 큰 바다와 연해 있고 남북으로 구려(고구려)와 백제에 접해있다... 송나라 때에... (신라를) 사라라고 하였다. 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이름이 모진(법흥왕)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백제를 수행하는 하인으로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 宋時... 或曰... 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이二年王名募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양서(梁書) 권54, 열전48 제이(諸夷)>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 밖에 있다. 신라 땅은 동쪽으로 큰 바다와 연해 있고 남북으로 구려(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 송나라 때는... (신라를) 사라라고 하였다. 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양나라 보통 2년(A.D.521; 신라 법흥왕 8)에 성씨가 모, 이름이 진인 신라왕(법흥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수행하는 하인으로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新羅... 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麗百濟接... 宋時... 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梁普通二年王姓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신라가 한(韓)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가야)에 속하기도 했다. 그 나라(신라) 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는 없다. <'양직공도'서 신라 · 고구려 제기 발견돼 - 서울신문 참조>
538년에 백제 성왕은 몸소 백제와 신라 및 가야 두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회복했다. 또한 군사를 전진시켜서 평양을 쳤다. 모두 6개 군의 땅을 회복했다. <일본서기>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한 후, 이 말을 고구려에 전했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先是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髙麗真興曰國之興亡在天若天未猒髙麗則我何敢望焉乃以此言通高麗高麗感其言與羅通好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흥왕>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이 정작 힘들게 개척했던 군사기지를 후퇴하는 시점을 전후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산 정상 부근에 (몰래)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 碑文은 승려 아닌 거칠부 작품" - 문화일보 참조>
진흥왕 순수비를 왜 높은 산에 세웠는 지 ... 진흥왕이 비석을 ... 신라가 후퇴하는 지역에 (몰래)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 비문 거칠부가 지었을 것" - 경향신문 참조>
552년 고려(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백제와 가야를 멸하려고 도모한다.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券19) 흠명천황(欽命天皇. 킨메이천황: 백제 성왕)>
신라는 서쪽 오랑캐로서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르고 예의가 없으며 우리의 은혜와 의로움을 저버렸다... "(백제는) 신라가 궁해져가는 것을 애달피여기고 신라왕이 목베일 것을 온전히 두었으며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었고 신라를 남달리 번영하게 해주었다 ... (백제가) 신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볍게 대우했으며,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가. 그러나 신라는 ... 임나(대가야)를 능욕해 멸망시켰고 ...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잔인하게 백성을 죽였다 ... 간을 꺼내고 발목을 끊어도 마음에 흡족해하지 않고 뼈를 드러내고 주검을 태워도 혹독하다 여기지 않았다. 임나(대가야)의 귀족과 백성 이하 모두는 칼을 다 쓰고 도마를 다하도록 이미 살육당하고 회쳐졌으니 어찌 온 천하가 ...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을 것이다.
新羅西羌小醜 逆天無狀 違我恩義... 哀新羅所窮見歸 全新羅王將戮之首 授新羅要害之地 崇新羅非次之榮 我氣長足姬尊 於新羅何薄 我百姓 於新羅何怨 而新羅 長戟强弩 凌蹙任那 鉅牙鉤爪 殘虐含靈 刳肝斮趾 不厭其快 曝骨焚屍 不謂其酷 任那族姓 百姓以還 窮刀極俎 旣屠且膾... 而不悼心... 報君父之仇讐 則死有恨臣子之道不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欽命天皇. 킨메이 천황: 백제 성왕 23년: 562년)>

김유신이 진덕여왕에게 "백제를 칩시다."라고 말했다. 진덕여왕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인 신라가 대제국 백제를 건드렸다가 장차 위태로워지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庾信 告大王曰請"伐百濟以報大梁州之役.”王曰"以小觸大, 危將奈何?"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三國史記 列傳 第一 金庾信 上)>
당 태종 황제께서 김춘추에게 정2품의 관작을 내리시니 그 영예는 ... 만큼 높은 것이라... 김춘추가 진덕왕 2년 당태종 황제께 당나라의 관복을 하사받고 돌아와 신라의 의관제를 당나라식으로 고쳐서 이듬해부터 신라의 왕과 관원들이 모두 당나라의 관복을 입고 당태종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당나라의 고종 황제께서도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김춘추로 신라왕을 삼노라 하였다. 당나라의 황제께서는 김춘추가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 궁굴에 조회하여 열심히 조공을 바치는 것을 가상히 여겼다.
김춘추가 당태종을 보자,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가 거의 멸망하여 위급함을 알리고 많은 예물을 바쳐 당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며 아들 법민(문무왕)과 인문 등을 당나라에 인질로 두고 신라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의복과 관복을 입고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썼다(신라는 당나라의 지방 정부가 되었다). 김춘추는 조선을 업신 여기고 모욕하는 글을 그대로 가져다가 신라에 유포 시켜서 사대주의 의 병균을 퍼뜨렸다.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으니 신라 선덕여왕 이 당나라에 사신(使臣) 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렸다.
다시 당에 거듭 군사를 요청했으나, 당 태종은 여왕의 무능함을 질타하며 거절한다.
김춘추가 신라의 왕으로 등극했고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의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공해
33개 성을 빼앗아 가자 이번에도 김춘추가 당나라에 병력을 요청했으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다.
김춘추가 또 다시 당나라 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당나라의 결정권자가 된 측천 무후는 드디어 김춘추의 파병요청에 응했다.
한반도에 이해관계 많은 산동파 권력 장악... 개전 논의 가속화... 관롱파 숙청... 측천 무후와 그 일당은 내부 숙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 관롱군사집단의 거두 장손무기가 사라지고 산동파가 조정내 결정의 대세를 움직일 수 있는 우위... 국익에 우선한 파벌의 이해... 토번... 서역에 전운... 그럼에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
<당나라에 억류 조치 당나라, 서기 660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 - 국방일보 참조>
예식진 ... 중국 산동에 살던 예씨 ... 수나라 ... 때 동래자사인 예선(善)이 백제로 왔다. <의자왕 중국에 넘긴 백제 예씨 ... - 연합 참조>
예식 가문이 중국에서 백제로 건너간 후손 ... 이 가문이 중국 유민을 표방했다 ... 중국 산동에 살던 예씨가
... 수나라 ... 때 동래자사인 예선(善)이 백제로 왔다. <의자왕 중국에 넘긴 백제... - 국제신문 참조>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 <의자왕은 승리할 수 있었다 - 한겨레 신문>
5세기 전반부터 공주 지역에 터를 잡고 있던 예식의 조상들은 중국 산동반도 서남쪽에서 건너온 중국계 이주민이었다... 전쟁포로는 대개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는 것이 일반적... 그러나 의자왕과 백제 포로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당 고종은 ... 모두 사면하였다. 여기에는 소정방의 노력이... 소정방은 ... 포로들을 처형하지 않고 모두 사면하도록 황제에게 늘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의자왕은 ... 사면되었다. <웅진성 방어 맡은 예식 의자왕 포로로 바치고 당에 들어가 출세 ... - 주간조선 참조>
소정방이 독살되어 신라에 묻혔다. 定方 ... 鴆之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당군을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당나라의 고종황제는 신하들을 책망하여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어 포증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대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말하였다. 帝悼之責謂侍臣曰定方於國有功當褒贈若等不言何邪 <신당서(新唐書)>
소정방이 죽었으나 누구 하나 포증하자는 말이 없자,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탄식하여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어 포증하는 것이 합당한데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으니 탄식하여 애도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노라.'라고 말하였다. 高宗聞而傷惜謂侍臣曰蘇定方於國有功例合褒贈卿等不言遂使哀榮未及興言及此不覺嗟悼 <구당서(舊唐書)>
부여융은 조부인 무왕이나 부왕인 의자왕이 당으로부터 부여받았던 대방군왕... 을 동일하게 습봉하였다... 백제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안고성의 백제 왕국은 8세기 중반이나 9세기 초반... 발해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에 (백제가) 발해말갈에 분할 되었다는 구절은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 멸망시기 8세기 중반~9세기 초로 봐야 - 서울신문 참조>
생존을 위한 신라의 對唐(대당) 저자세 밀약 <삼국통일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 월간중앙 참조>
<한국사는 없다, 저자: 이희근, 사람과 사람, 2001년 08월 30일 참조>
<한국사 새로보기, 저자: 신복룡, 풀빛, 2001년>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저자: 이이화, 푸른역사, 2000년 06월 30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왕명을 받아 최치원이 글을 썼다... 국립경주박물관...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적었다... 조금 더 읽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의 잔당이 태백산 아래 모여서 발해를 건국했다.'... 삼한통일은 깨진 것이다. 마한이 결국 발해가 됐으니... 최치원은...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서... '...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 삼국 통일이 아니라, 삼한 통일조차 못한 것... 이 글은 왕명을 받아 작성... 왕의 '최종 결재'도 받았을 것... 신라의... 왕실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했음'...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감사하며 효공왕이 올린글'... 에서도 '예전의 고구려가 지금은 발해가 됐다'고 기록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신라인은 삼국 통일에 부정적 인식... 사학계 '신라 띄우기' 역사 왜곡 불러 - 한겨레21 참조>
당나라는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4만 명으로 알려졌으며 672년 8월 신라군이 석문(石門)에서 당나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신라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신라군의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과 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과 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과 양신(良臣) 등이 사망했다... 석문전투 이후 9월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죄문과 금, 은, 구리, 바늘, 우황, 포목 등 막대한 진공품을 바쳤다. 이 해 신라는 곡식이 귀하고 기근이 들었다.
<석문전투(石門戰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문무왕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臣) 아무개(문무왕)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일(前日)에 신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황제 폐하의 구원을 입어 도멸(짐승처럼 찢어 죽임을 당하여 도살되어 멸망하는 것)을 면하게 되었사옵나이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황제 폐하의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나이까.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신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하늘의 군대를 이끌어 신을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나이다. 신이 미처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신령스런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신은 전대(김춘추)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드디어 성스러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서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토벌하게 하셨나니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남음이 있어,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이 사정에 귀를 기울여 판단해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육시하다(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을 받겠나이다.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빌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당나라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형벌을 엎드려 청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서 얼굴의 광채를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시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까지 흐르나니 만일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아뢰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아무개(문무왕)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王獲罪大朝上表乞罪曰臣某死罪謹言昔臣危急事若倒懸遠蒙拯救得免屠滅粉身?骨未足上報鴻思碎首灰塵何能仰酬慈造然深讐百濟隔近臣蕃告引天兵滅臣雪恥臣懼破滅自欲求存枉被凶逆之名遂入難赦之罪臣恐事意未申先從刑戮生爲逆命之臣死爲背恩之鬼謹錄事狀冒死奏聞伏願少垂神聽炤審元由臣前代已來朝貢不絶近爲百濟再虧職貢遂使聖朝出言命將討臣之罪死有餘刑南山之竹不足書臣之罪褒斜之林不足作臣之械?池宗社屠裂臣身事聽勅裁甘心受戮臣?擧在側泥首未乾泣血待朝伏請刑命伏惟皇帝陛下明同日月容光?蒙曲炤德合乾坤動植咸被亭毒好生之德遠被昆蟲惡殺之仁爰流翔泳?降服捨之宥賜全腰領之恩雖死之年猶生之日非所希冀敢陳所懷不勝伏劒之志謹遣原川等拜表謝罪伏聽勅旨某頓首頓首死罪死罪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銅三萬三千分針四百枚牛黃百二十分金百二十分四十升布六匹三十升布六十匹是歲?貴人飢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왕이 당나라에 용서를 구하다 (672년 09월(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사람들이 굶주리다 (672년 (음))>
672년 이근행은 20만 명이 아닌, 자신의 말갈족 병사 3만 명을 지휘해 한반도에 왔다.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을 패주시킨 게 아니라, 토번과 전쟁을 위해 이근행 부대가 철수했다. 675년 당나라의 신라 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매소성 전투는 벌어졌다.
<한나절에 읽는 발해의 역사, (공)저: 이윤섭, 이선영 참조>
기벌포 전투의 내용도 양측 주력군의 회전이 아니라...신라 측 주장인 시득의 관등이 8등인 사찬이기 때문에 신라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또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뒤 크고 작은 전투가 22회나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 사이의 전투라고 보기 어려운 전황...기벌포 전투가...나당전쟁을 마무리 짓는...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 매경프리미엄 참조>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676년 11월(음)) 그런데 '구당서 권제83'과 '신당서 권제111'의 열전 설인귀 전에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674~676년에 중국 남부의 상주(象州)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670년 8월 토번(吐蕃)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패배 후 제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신문왕대(681~692)에 신라는 한강 이북 지역을 거의 방치...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 헌덕왕(809~825)에 이르러서야 대동강 남쪽 연안을 신라의 영토로 확정...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 신라가 애초부터 삼국 통일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諸侯之外守者(제후지외수자)라 자처...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들의 비문들에서는 有唐新羅國(유당신라국), 大唐新羅國(대당신라국) 이라 하여, 신라는 스스로를 당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이전의 형식적, 실리적 사대가 이념적, 실질적 사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라는 계속해서 골품제를 유지함으로써 삼국민의 융합에 제약을 가했다... 김부식도, 고러시대와 조선시대 왕조에서도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하야시 다이스케는 저서 '조선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로 규정... 그 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신라의 반도 통일'로 정의... 일본 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 만주를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옛 고구려 땅은 더 이상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검토 참조>
당나라 현종은 볼모로 장안에 와있던 김사란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발해를 치는 대신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당나라 현종의 밀약을 믿고 김윤중과 김윤문 등 4명의 장군들에게 발해의 남쪽 경계를 치도록 했으나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받았다.
당나라의 현종은 김사란을 귀국시켜 군사를 일으켜 말갈(말갈은 발해를 가리킨다.)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려 한 길(丈) 남짓 쌓여 산길이 막히고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여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733) 秋七月 唐 玄宗 金思蘭歸國發兵擊靺鞨南鄙㑹大雪丈餘山路阻隘士卒死者過半無功而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8(第八) 성덕왕(聖德王)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공격을 요청하다>
고대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신분을 나누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근친상간... 카자흐스탄에 살던 스키타이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크 수이예크(... 흰 뼈 제도)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 천마를 그린 나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 전자신문 참조>
신라의 골품제도를 살펴보면 근친상간과 같은 난잡한 성횅위가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왕족으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있다. 이러한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이 되고 그 자손이 궁궐에 남기 위해서는, 오직 직계 혈통의 왕족끼리 결혼해 성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 중앙일보>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첬다.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
<...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 중앙선데이 참조>
진골이 많아지자 권력쟁탈전이 치열해져서 김춘추의 후손 낭혜 등 진골귀족을 6두품으로 강등하였다. 권력쟁탈전에서 패한 자들은 지방으로 밀려나 신분이 강등되었다.
<진골(眞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해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귀족들이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노비를 3,000명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에 남의 집 노비가 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도 생겼다. 소수의 사람이 수많은 노비를 부리게 되자, 세금을 바치는 농민의 수는 더욱 줄었다. 수입이 줄어든 정부는 남은 땅과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세금을 매겼다.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은 산으로 숨었으며,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해 신라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895년 세워진 해인사의 묘길상탑에서 '나라 안에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굶어 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라는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벽돌 판이 나왔다.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다.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하고 빌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참조>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분쟁이 생겨도... 물러서는 모습이 상대를... 아주 경멸해서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앙문답] ...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 기독일보 참조>
<아프간... 이보다 썩은 나라는 없다?!... >
신라의 화랑(花娘) = 아프가니스탄의 바차 바지"
<아프간 악습 '바차 바지', 어린 소년 여장시키고 성적 학대 - 기독일보>

아프간 악습 '바차 바지', 어린 소년 여장시키고 성적 학대
미국법과정의센터(ACLJ)가 아프가니스탄의 소년 매춘과 성적 학대 풍습인 '바차 바지(bacha bazi, '소년과 놀다'라는 의미)'를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유엔에 촉구했다.
모죽지랑가...사다함...비록 실학자였지만 엄숙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호 이익(1681~1763)이 아유가이가 동성애 집단 이야기를 꺼내기 200년 전에 <성호사설>(제18권)에서 미남자로 뽑혀 얼굴에 분을 바르는 화랑들의 '음란하고 추악한 <남색(男色)>'을 개탄한 바 있다.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한겨레21 참조>
화랑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다정한 젊은이 <화랑은 무사 집단이었을까 한겨레 21>
또한 몇몇 향가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 화랑들의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화(花)'나 '랑(?)'도 여성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이다... 미모의 남자를 화랑으로 삼게 됐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화랑들은 자연스레 동성애의 대상이 됐다.
<...기록상 최초 동성애자 군주는 신라 혜공왕 스포츠경향 참조>
왕에게 전문적으로 섹X를 제공하는 특수 상류계층이 존재한 나라, 남매끼리 결혼이 자연스러웠고 남자도 ... 몸을 바쳐야 했던 나라 ... 신라다.
<문란인가 자유인가 섹X천국 신라 - 뉴시스 참조>
화랑(花郞)은 무당의 지아비이고, 방언에는 광대라 하였다. <목민심서>
화랑은 선도(仙徒)이며, 신궁(神宮)을 받들며, 하늘에 큰 제사를 지낸다. <화랑세기>
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방언으로 무당이며 귀신을 섬기고
원화(源花)를 받들기 시작했다. ... 그 여자를 쓰고자 하였다. ... 그후 다시 미모의 남자
를 모아서 그 남자를 꾸미고 치장하여 그 남자를 받들며 화랑이라 하였다.
첨성대... 금성의 여신 이슈타르를... 모시기 위한 지구라트
<신라 선덕여왕과 첨성대의 비밀 - 조갑제닷컴 참조>
우물 정(井)자에 숨은 뜻... 신라인에게 우물은 특별한 의미... 신라인에게 우물은... 하늘과 통하는 장소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 개인 제단" - 신동아 참조>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첨성대는 우물, 우물의 여신 <... 여신연구가가 본 첨성대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 여성신문 참조>
<우물에 던져진 아이… 9세기 신라엔 무슨 일이? - 조선일보 참조>
<통일신라때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있었다? - 서울신문 참조>
"단군... 바알신" <단군신화와 성경의 바알신 - 경북연합일보 참조>
"다곤신은 단군" <단군은 '옛 시리아의 신'... 황당하다고? - 한겨레 참조>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